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precipice, 163

침묵해야 하는 지

이상한 저녁이었다.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한 저녁이었어. 퇴근 후 바로 집으로 갔다. 가방을 방에 내려놓고 코트 주머니에 든 것들을 화장대와 책장 등 그들의 자리에 올려놓은 뒤 옷은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거실로 가 바닥에 옆구리를 붙이고 누웠다. 그 자세로 두 시간. 밤에 집으로 돌아온 임여사는 이불에 덮여진 나를 보지 못했는 지 컴퓨터를 하고 있던 두툼이에게 물었다. "딸은?" 아마도 두툼이는 턱으로 나를 가르키며 "저기" 라고 했을 거다. 뒤통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머리와 몸을 일으켜 멀그런히 앉았다. 그러다 일어섰다. 냉장고 앞에 서 지껄여지는대로 말했다. "기분이 슬퍼. 기분이 안 좋아." 너가 그런 말을 할때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고..

⌳ precipice, 2013.02.21

주문진 횟집

날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있었다. 조리과를 졸업한 여자로, 한중양일식제과제빵의 정규과정을 모두 수행했지만 매 실습시간마다 날것(생고기, 생선)들을 만지는 것이 힘들었다. 조리해 맛을 보면 맛은 참 좋았지만 그 과정의 귀찮음보다 그 물컹한 촉감에 여간 정이 가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일식시간 스시를 할때면 얼굴의 모든 근육을 움직여 인상을 쓰곤 그와는 반대되는 예리한 손길로 생선의 뼈와 살을 분리하곤 했었지. 추억 돋네. 그랬었는데 언제부턴가, 기억하기로는 스물 한 살 여름이었던 것 같다. 오랜 친구와 처음으로 부산여행을 갔었는데 부산에 왔으니 회는 제대로 먹어줘야하지 않겠냐며 그럴싸한 해운대 근처 횟집에서 모둠정식을 먹었더랬다. 충격이었지 그 맛은. 싸이월드를 뒤져보면 상을 다 휩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젓..

확실(確實)

더 명백한 무언가 더 확실한 무언가 더 명확한 무언가 더 분명한 무언가 더 명명한 무언가 없다, 라는 걸 왜- 다시- 지금에 와서- 깨닫는 게 아니라 알아버리는 거지. 문자들 틈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음과 모음 그 찰나의 공백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화자는 나였고 청중 역시 나였다. 소리 내며 읽는 것이 습관이 된 일상이 불편한 여자는 그 소리들이 향하는 콤파스의 중심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거다. 그랬는데, 그럴 수가 없는 거거든.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거든.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거거든. 그보다 더 확실한 이유는 없는 거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더는 껴안을 수 없는 슬픔 따위와 고독 따위의 요람을 내 안에서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자만으로, 그간 가는 줄 위에..

⌳ precipice, 2013.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