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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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모든 계절이니까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고 두 손 놓고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기를 한다. 무엇이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라는 불안으로 지난 메모들을 뒤적인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으로 두 손을 일단 무작정 움직여본다. 누구에게 강요받은 것도 강제당한 것도 아님에도 혼자 초조해한다. 돈을 받는 것도 직업이 되는 것도 명예가 되는 것도 아님에도. 입김이 생겨나나 후 하고 숨을 내쉬며 곧 겨울인가 겨울이 오는 건가 당신을 당겨 실감하려 한다. 당신은 내게 겨울이고 하물며 모든 계절이니까. 하물며 모든 계절이니까.

seek; let 2023.10.20

팔월과 구월과 또는 시월에

/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이고 내가 미워하는 것 역시 합당하다고 학폭 가해자 같은 마인드를 갖게 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그 사람(들) 잘못이니까. 1)그래도 애는 착해 2)착하기만 하고 일을 못하면 그건 못 된 거야 3)그래도 애는 착해의 악순환. 일과 돈이 크로스로 묶여버리니 부정적인 감정의 처리값이 쉽게 계산되지 않는다. 닮아있는 일을 십여 년째하고 있는데 이제 거의 한 지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통달과 해탈의 지점이 아닌, 환멸과 포기의 지점이라는 게 약간 문제라면 문제다. 문자 그대로 배운 게 도둑질인데 이 도둑질이 싫어지면 어떡하지 평생 크게 해보지 않은 뭐 해 먹고살아야 할까 라는 생각을- 그렇다고 지금 하지도 않지만. 일을 해서 ..

ordinary; scene 2023.08.09

한여름

/ 조언이랍시고 충고랍시고 또는 그냥 하는 말이라며 내뱉을 때는 아무런 자각도 없었던 많은 말들이. 그때의 의중은 내가 하는 말과 생각이 늘 옳다는 가정이었다. 정답이라고 여겼는데 처음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삼켜야 했다. 목에 턱 하고 걸려 넘어가지지 않는 걸 꾹 참고 꾹 삼켰다. 내가 틀렸으니까. 서른을 한참 넘겨 인간관계에서 무언가를 깨우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금에라도 깨달아 다행이었다고 스스로 위무했다. / 스스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 부정적인 것들은 최대한 흡수하지 않으려 애쓰곤 하는데, 생활이란 것은 늘 일과 돈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어서 일하며 돋아나는 적갈색의 감정들을 다스리려 심호흡을 크게 하는 요즘이다. 동료가 밉다가도 짠하고 짜증이 나 목소리가 커지고 이래서 내게 남..

ordinary; scene 2023.07.27

'나는 반쯤만 태어났다'

앓는 소리를 내는 것, 아프다 칭얼거릴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어느 정도의 치유가 된다. 열이 피어난 얼굴을 쇄골뼈에 기대고 잔뜩 부비면 '많이 아프네. 뜨겁다.' 하며 꽉 끌어안아줌으로 고됐을 나의 하루를 치하해 준다. 그제야 '아, 나 많이 아팠구나.' 종일 쥐고 있어 손끝마저 아릿했던 하루의 긴장을 푼다. 그 순간 모처럼. 그런 한사람을 찾는 여정과도 같지 않을까. 사랑이라 하는 건.

ordinary; scene 2023.06.20

오래 살라고

/ 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엇일까. / 위기의식이 든 것은 아니지만 평범하고 무탈한 일상이 괜스레 머쓱한 마음에 출근길에 충동적으로 맥북을 챙겨 나왔다. 오늘의 일을 해내며 저녁이 끝나가는 시점엔 집으로 갈 것인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것인지 잠시간 고민도 했지만 지난주엔 이 고민 뒤에 미련스러운 태세로 무거운 가방을 다시 이고 지고 집으로 갔었기에 오늘은 보다 가뿐한 마음으로 약수역에 갈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버스 안에선 무엇을 마실지, 커피를 마실지 예전에 보니 병맥주도 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마실지 그래도 집에 사놓은 빅웨이브 있는데 바깥에서 9천 원 주고 마시기엔 좀 아깝지 않을까 나는 카페인에 약하니까 디카페인으로 마셔야겠다 살찌니까 주전부리는 먹지 않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

ordinary; scene 2023.04.19

눈을 감는 건

사랑의 말을 적고도 싶었고 그리움의 말을 적고도 싶었다. 사랑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그리워하는 나날을 몰래 삼키기도 했어서. 또 한 달의 끝을 닫으며 이런 식으로라도 말꼬리를 늘여 놓으면 계속해서 이 가느다란 끈이 이어질 것만 같으니까. 처음 들어본 말 앞에 애꿎은 손톱 끝을 뜯으며 숨소리만 골랐다. 놓쳐야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아 잡지 않았다. 그게 그를 위한, 그가 바라는 게 아닐까 했는데. 돌아온 말은, 이렇게 쉽게 놓을 수 있는 거냐고. 그런 거였느냐고. 왜 잡지 않느냐는 말. 잡아도 되는 거였을까 바랐던 것이 그것이었을까. 입을 벌리고 숨만 죽이던 그때에 떠오르던 건 다름 아닌 십여 년 전 나의 못난 뒷모습. 말을 떼어볼 걸 입을 열고 바짓가랑이를 붙들어 구질구질하게 들러붙고 매달려볼 걸 잡아..

seek; let 2023.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