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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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의 종말

마땅한 글감이 없다고 을씨년스럽게 비워두곤 하는 이 공간에 쓸 말이 생겼다고, 할 말이 있다고 찾아오게 된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일까.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낯을 들여다보면 괜찮다고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거다. 되려 불편한 감각이 돋아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짝사랑에 대해서 쓸 거니까. 나의 외사랑을 쓸 거니까. 부모에게 덜 사랑받는 자식이 쓰는 이야기니까. 처음 하는 짝사랑이다. 한 두 달 전일까 인터넷에서 그런 글귀를 봤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외사랑이 존재한다고.'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바로 떠오르는 장면이란, 자식이 닫고 들어 간 방문을 쓸쓸하게 쳐다보는 부모의 처진 어깨와 뒷모습일 수 있겠지만 내가 읽고 느낀 장면은 두 주인공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부모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ordinary; scene 2022.12.17

꼬박 한 달

쓰고 보니 '꼬박'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귀엽다. 꼬박. 순간 말이 너무 귀여워 다른 날처럼 사전에 검색해 보니 유의어로 '고스란히'가 걸린다. 얘는 또 이거대로 귀엽고. 꼬박과 고스란히 라니. 시월을 맺으며 적었던 일련의 일상들이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그로부터 꼬박 한 달이 지난 것이다. 흘러 다시 더해진 그 한 달의 이야기를 십일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또 적어 기록하려 한다. 내일이면 다시 한 달이 더해 흐르겠지. 그럼 해의 숫자가 바뀌는 날이 또다시 올 테고. 11월은 뭐랄까. 무뎠고 행복했다. 오랜만인 것은 맞지만 처음은 절대 아니었던, 오래 손과 머리에 익은 일을 다시 시작한 11월 1일의 첫 하루. 일하는 사람과 방식이 같거나 흡사해 몇 년 전 카레 점장이던 전생이 자주 떠올랐다. 유독 이..

ordinary; scene 2022.11.30

시월을 맺으며

다시 내게 다가오는 하루가 될 뿐인데, 날짜와 숫자에 의미를 조금은 두고서 시월을 맺는 글을 몇 자 적고자 한다. 앨범에 든 사진들을 보며 지난 한 달을 가늠하고 몇 장의 사진들로 월간 일기를 기록할까 했는데, 보정되지 않은 날것들이라 내가 생각하는 시월의 내 모습인 사진 한 장으로 단정 지으려 한다. / 2일의 일요일. 공휴일이 두 번 있었다. 개천절과 한글날. 학생 때도 일개미 때도 카레점장 때도 커피매니저일 때도 빨간날을 빨간날로써 소비해 본 경험이 적은 나는 3년 남짓 고정 데이트 요일이 된 우리의 일요일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까만 고심한다. 짧게는 이틀, 월차에는 사흘을 연인과 함께 보내는데 공휴일을 앞두고 강남권 숙소 비용이 뜨악스럽게 뛰어 토요일 밤이 아닌 일요일 한낮의 강남에서 몇..

ordinary; scene 2022.10.31

달리고 걷다 보면

오늘은 10월 8일이다. 코로나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던 갖가지 축제들이 서울 곳곳에서 날 좋은 이때를 놓칠 수 없다는 승부욕이라도 보여주듯 앞다투어 열리고 있다. 오늘은 여의도에서 불꽃축제가 있다. 열흘 전부터 인스타그램에선 숨겨진 불꽃 축제 감상 명소들이 피드에 랜덤으로 뜨고(피드에 이미 떠버리는데 어떻게 숨겨진 명소일 수 있을까) 뉴스에선 혼잡할 여의도 도로 사정과 대중교통 이용의 어려움을 내보낸다. 사람들은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을 맨 눈으로 보기 위해 여의도 일대로 낮부터 몰려들고 있다. 평소보다 일찌감치 일어나 긴 샤워와 샐러드로 식사까지 마친 나도 여의도가 아닌 어딘가로의 외출을 아주 잠시간 고민도 했지만, 오늘 서울의 핫플이라고 한 번이라도 호명된 적 있던 모든 곳들은 사람들로 부글부글 끓을 ..

ordinary; scene 2022.10.08

계절 옷

대부분을 끄집어 내 바닥에 내려두고, 다시 접고 걸어서 행을 맞추고, 걸쳐 보고 둘러보고 발을 넣다 말고 한 발치에 던져두고, 지난 계절에 분명 아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버려야 할지 애매해져 버린 것들과 눈싸움을 잠시 했다가 결국엔 이기고 결국엔 지고, 내 몸 구겨놓은 것 같은 부피의 봉투 한 봉이 만들어지면 그래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자, 부유하는 먼지들을 줄줄 흐르는 콧물로 가늠하면서, 그렇게 한 계절을 접는다. 어떤 때엔, 때일러서 어떤 때엔, 지난번을 참고했다가 때늦어서 수십 번의 계절을 수백 번의 절기를 지나면서도 도통 딩동댕에 닿지 못하지. 옷을 정리하며 계절을 접고 시간을 개는데 손가락을 접어가며 슬픔을 센다. 가을을 통과해 겨울에 닿고 그 중앙에 놓이는 날, 모자란 손가락에 이젠 셈을 어떻..

seek; let 2022.09.29

듣는 이는 없고

듣는 이는 없고 말하는 이만 남은 흑백 무대에서,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고, 남겨야 한다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감에 머리를 감싸고 앓아도 보지만 진정 기록하고 싶은 것이 어떤 목차를 이뤄야 하는지 계속 머뭇거리게 된다. 일기 한쪽을 못난 글씨로 채워가며 알아가는 건, 내게 글감이 되는 것이 턱없이 적다는 사실이다. 내가 쓰는 것들이란 당신이거나, 당신과의 이야기 거나, 지긋지긋한 옛사랑이거나, 자기 환멸과 비슷한 스스로를 향한 애증이거나 하는 이제는 아무렇게나 발에 차이는 흔해 빠진 것들 뿐이다. 그래서 글이 이어지기 쉽지 않고 계속해서 써가는 것은 어렵다. 더는 당신을 쓰지 못하는 날이 오는 걸 수도 있겠다. 타이핑을 하고 나니 놀랍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순간이다. 당신..

seek; let 2022.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