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40

매뉴얼

매일 하나씩, 두 달 동안 60개의 질문을 받고 그에 답했다. 질문들은 온전히 내게 향했고 나의 대답 역시 온전히 나로부터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맥락이 비슷하게 묶이는 질문들이 여러개 있었고 그에 대한 나의 대답과 고민의 시간도 비슷하게 묶이곤 했는데 그것들의 공통점을 정의하자니 스스로 좀 우스워졌다. 내가 매번 걸려 넘어지는 질문들은 내게 '가장'을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 '가장' 싫어하는 건 또 뭔지. 두어개를 꼽아보라, 다섯개를 꼽아보라가 아니라 '가장'으로 하나의 대답을 원했다. 나는 매번 멈칫했다. 스물셋부터 나의 삶은 뭉뚱그려졌다. 내가 그렇게 정의내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다. 그 외는 모두 흐릿하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싫은 것도 없다. 모두 감정의 영역..

ordinary; scene 2021.08.04

엄마

얄팍한 문 가운데 두고 속으로 삼킨 눈물이 많았다. 운동을 다녀와 종일 요리를 했다. 엄마의 퇴근에 맞춰 함께 공원을 걸었다. 눈이 나쁜 나는 저멀리 걸어오는 그림자의 주인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먼저 꺄르르 웃음이 터진 엄마가 내게 바삐 다가왔다. 그 순간이 바보같이 눈물겨웠다. 늘 나를 먼저 알아 볼 사람. 잘 있는 듯 안심시켜야 하는 이가 늘어난다는 것은, 어쩌면 참 피곤한 일이다. 고단한 마음의 무게들. 나는 사실 나를 포기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그리고 이 세계가. 빤히 쳐다보기에 왜 그러냐 물으니 '예뻐서' 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술 적당히 마시고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 그래서 술을 적당히 마시고 아침 일찍 들어갔다. 엄마는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돈을 다..

ordinary; scene 2020.12.20

마음들의 포자

- 언제가 되어도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낱낱이 느껴간다. 쉬운 일이 하나 없어서 연일 나의 감정을 할퀴고 흔들어 놓는다. - 주기적인 자기환멸. 불안 앞에 도리질하며 이 밤, 또다시 걸려 넘어진다. - 짜증의 대상이 잘못됐다는 걸 분명 느끼는데도, 제멋대로 분출대는 모양새를 누그러뜨릴 수가 없다. 상처주게 될 거라며 벌써 미안함을 빚지는 것만 같다. - 술만 안마셔도 빠듯하지만 모자라지는 않을텐데, 그것마저 포기하고 양보하고나면 내 삶은 분명 척락해질 것이다. 꾀죄죄한 여유를 얻느니 반질반질한 궁핍을 택하련다. - '그 이상의 마음인거야.' 라는 대답 앞에 내색할 순 없었지만 힘껏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 '사랑하지 않고 스쳐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 ..

ordinary; scene 2020.12.19

얕은 말들과 마음들

- 어떤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심장 뛰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어떤 밤엔 몸을 안으로 잔뜩 말아보곤 해. - 나의 겨울에 여전한 당신. - '괜찮은 척 한다.'는 속깊은 비아냥이 그저 고마워서. - 열심인 누구로부터 도착한 우유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조금 차가운 것을 한 손에 들고 다시 돌아오는데, 비가- 비가 떨어지고 있다. 손을 뻗어 소매를 부러 적시고 그 자리에 잠시 쪼그려 앉았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사과는 매번 서툴다. - 어떻게 해도 안되는 게 있어. - 양치하고 있는 엄마를 뒤에서 꼬옥 끌어 안았다. 작은 사람이 품에 가득 들어온다. 나의 죄를 설명할 수 없지만 마치 용서받은 것 같았다. 나의 유일한 구원. - 사랑을 믿지 않..

ordinary; scene 2020.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