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280

침묵해야 하는 지

이상한 저녁이었다.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한 저녁이었어. 퇴근 후 바로 집으로 갔다. 가방을 방에 내려놓고 코트 주머니에 든 것들을 화장대와 책장 등 그들의 자리에 올려놓은 뒤 옷은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거실로 가 바닥에 옆구리를 붙이고 누웠다. 그 자세로 두 시간. 밤에 집으로 돌아온 임여사는 이불에 덮여진 나를 보지 못했는 지 컴퓨터를 하고 있던 두툼이에게 물었다. "딸은?" 아마도 두툼이는 턱으로 나를 가르키며 "저기" 라고 했을 거다. 뒤통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머리와 몸을 일으켜 멀그런히 앉았다. 그러다 일어섰다. 냉장고 앞에 서 지껄여지는대로 말했다. "기분이 슬퍼. 기분이 안 좋아." 너가 그런 말을 할때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고..

⌳ precipice, 2013.02.21

03_한 공간 세 개의 이유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   드라마 '내 딸 서영이'에서 이보영이 한 대사. 드라마 여주인공이 헤어진 지난 연인에게 바닥 저 밑까지 들켜버렸다는 걸 알아버리곤 제발 곁에 있지 말고 모든 걸 끝내 달라며 뱉은 대사. 쓱하며 빠르게 귓속으로 박혀 들렸다. 문장이 촉각이 되어.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처참함과 수치스러움이 동시에 엄습해 흐르는 눈물조차 냉랭해져 버리면 무얼 할 수 있을까. 그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지는 않았을까. 왜 모든 절망의 기억은 겨울에 밀집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낮은 공기의 온도 때문에 그만큼 더 선명한 걸까.   두 무릎을 모으고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 작아진 몸의 태를 기억한다. 옆에 앉아 있었지만 손을 뻗어 당신의 굽은 허리를 펴줄 수도 없..

seek; let 2013.02.17

02_그 전봇대에 붙어있던 스티커가

그 전봇대에 붙어있던 스티커. 그 스티커를 기억한다.그 스티커가 홍보하고 있던 업체의 이름이, 곧 우리의 그 자리 이름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를 그 이름으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바라보던 꼭대기의 달이 꼭 저렇지 않았었나 하는 오해를 지금 한 번 해본다. 사람들은 이해하는 것이 아닌 오해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문을 답처럼 던지던 작가 박민규의 그 말마따나.  열아홉의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해 여름의 당신의 모습은, 귀를 덮지 않게 정돈된 머리칼과 안경이 걸쳐진 매끈한 콧대, 품이 조금 커 보이던 리바이스진과 폴로 피케티. 종종 모자를 들고 있었다. 집에서 요리를 하고 온 날이면 손에서 식초 냄새가 났었다. 그것도 2배 식초. 나갈 준비를 하며 손 씻기를 반복했지만 새큼한 냄새가 쉬이 가시지..

seek; let 2013.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