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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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횟집

날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있었다. 조리과를 졸업한 여자로, 한중양일식제과제빵의 정규과정을 모두 수행했지만 매 실습시간마다 날것(생고기, 생선)들을 만지는 것이 힘들었다. 조리해 맛을 보면 맛은 참 좋았지만 그 과정의 귀찮음보다 그 물컹한 촉감에 여간 정이 가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일식시간 스시를 할때면 얼굴의 모든 근육을 움직여 인상을 쓰곤 그와는 반대되는 예리한 손길로 생선의 뼈와 살을 분리하곤 했었지. 추억 돋네. 그랬었는데 언제부턴가, 기억하기로는 스물 한 살 여름이었던 것 같다. 오랜 친구와 처음으로 부산여행을 갔었는데 부산에 왔으니 회는 제대로 먹어줘야하지 않겠냐며 그럴싸한 해운대 근처 횟집에서 모둠정식을 먹었더랬다. 충격이었지 그 맛은. 싸이월드를 뒤져보면 상을 다 휩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젓..

확실(確實)

더 명백한 무언가 더 확실한 무언가 더 명확한 무언가 더 분명한 무언가 더 명명한 무언가 없다, 라는 걸 왜- 다시- 지금에 와서- 깨닫는 게 아니라 알아버리는 거지. 문자들 틈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음과 모음 그 찰나의 공백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화자는 나였고 청중 역시 나였다. 소리 내며 읽는 것이 습관이 된 일상이 불편한 여자는 그 소리들이 향하는 콤파스의 중심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거다. 그랬는데, 그럴 수가 없는 거거든.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거든.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거거든. 그보다 더 확실한 이유는 없는 거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더는 껴안을 수 없는 슬픔 따위와 고독 따위의 요람을 내 안에서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자만으로, 그간 가는 줄 위에..

⌳ precipice, 2013.02.12

1월 26일 강릉 인구해변

기분 탓일 수도 있었겠지만 분명, 공기가 남달랐다고 자부했다. 콧속으로 스미는 바다의 기운이 소래포구의 비릿한 그것과는 완연히 다른 어떤 명쾌함이 있었다. 강원도라 추위와 바람의 강세도 남달랐지만, 밤에 도착해 첫 들이 쉰 강릉역의 숨은 황홀했다. 어깨와 가슴을 잔뜩 열고 숨을 폐로 깊이 밀어넣던 때에, 하늘의 별이 눈에 들어왔다. 좋지 않은 내 시력으로도 가늠되던 무수한 그 갯수와 명명함들. 소리를 꺅 하고 질렀다. 기분이 너무 좋아 강릉역 복판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양발에 트램플린이라도 달은냥 떼는 걸음마다 내가 튀어져올랐다. 아침에 보게 될 숙소 앞 해변의 절경을 다짐하며 기대로 계속 뛰는 심장을 다독여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을 온 몸에 휘어감고 베란다로 나가 입김 내뿜으며 천천히 지켜 본, ..

Moonrise Kingdom 문라이즈킹덤, 2012

포스터와 간단한 시놉만 보고난 후 보고싶어진 영화였다. 어딘지 낌새가 서두르지 않으면 극장에서는 볼 수 없어질 것만 같아 평일 퇴근 후에 부랴부랴 안국역으로 갔다. 아주 오랜만에 찾은 씨네코드선재. 몇 해 전, 처음 이곳을 찾아 갈 적에는 바보같이 길을 뱅뱅 돌았었는데 그 몇 해 동안 나의 길찾기 능력은 꽤나 발달해(뭐 못믿겠지만..) 네이버 지도를 보고 미리 알아가는 이 치밀함! 껄껄 그렇게 단번에 찾아가 을 보았다. 보이스카우트의 공식 왕따 고아 샘 집은 물론 학교에서도 구제불능 취급 수지 소년과 소녀는 첫 눈에 서로에게 반한다. 1년 여 동안 펜팔을 이어오던 둘. 만나기로 한다. 만나서 도망가기로 한다. 둘만의 장소를 찾아. 영화는 매우 사랑스럽다. 웨스앤더슨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러한지는 모르겠지..

⌳ precipice,/see 2013.02.08

다시, 눈이 오던 날

주말 이틀 중 하루는 대개 집에만 있는 경우가 잦다. 늦잠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하릴없이 잠을 푹 자내고 오후깨쯤 일어나 그저 그런대로 점심을 떼우고 한 마리의 거실 잉여가 된다. 이 날도 그랬던 듯 싶다. 메모리카드 일자를 보니 3일이라고 되어있다. 매거진과 TV 등 멈춰있는 것과 흐르는 것들을 종일 양껏 봐내고 난 후에 거실 전기매트 위에 누워 혼연일체의 시간을 보내던 때. 퇴근 후 돌아온 두툼이가 이야기했다. 눈오는데 그것도 많이. '음?' 트위터 타임라인을 재빠르게 훑으니 중부지방 최고 15cm 대설. 푸근했던 며칠이 질투라도 났던지 입춘(立春) 전 날, 겨울이 떼를 쓰고 있었다. 나 아직 여기 있다고. 포실포실 내리는 눈을 기대하며 카메라를 챙겨 현관으로 뛰었다. 마찬가지로 돌아온 임여사는 쟤가..

⌳ precipice, 2013.02.08

나는야 루팡

나는야 루팡, 월급루팡 오늘 하루 만큼은 월급루팡이 되겠다 호호호 왜? 오늘은 설연휴 전날이니까. 오후 3시 퇴근이라는 공지가 하달되고 난 미리 예상한 듯 가방에서 메모리카드와 리더기를 꺼낸다. 미처 집에서 보정 못한 바다 사진을 보정하기 위해서. 꺄르르르 거실 컴퓨터로 사진 보정을 하고 있으면 임여사는 꼭 묻는다. "거긴 어디야?" 내가 강릉에 다녀온 걸 임여사는 모르므로 집에서는 보정을 할 수가 없다. 당시 외박을 했었는데 임여사에게는 친구들과 인천 을왕리에 다녀왔다고 했다. 임여사에게는 강릉 겨울바다 로망이 있기 때문에 그 로망을 실현시켜주지는 못할 망정 지혼자 바다를 쳐보고(화가 나면 꼭 이리 밉게 말한다) 왔다고 분명히 엄청 서운해 할테니까 점심을 뭘 먹을지 고민을 미리 해야지 호호호

⌳ precipice, 2013.02.08